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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이야기

나를 위한 선택, 온전히 나만이 있는 선택들

헤일리씨 2020. 2. 9. 11:33

꽤 오랜시간을 고민을 해보다, 나는 드디어 대학원 생활을 잠시만? 아니 영원히?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지난 3년 반이란 시간동안 나는 나를 벼랑끝까지 몰아붙이며, 이 생활을 지속하려 했다.

 

 

 

첫번째 지도교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겉으로는 세상 정의로운 척 했지만, 매번 내 영어 실력을 지적하고, 나의 연구들을 비꼬았고, 그래서  나는 두번째 지도교수를 바꾸게 되었다. 두번째 지도교수의 수업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보였다.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연구에 대한 열정도 있어보였다. 나는 그녀와 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나의 지도교수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흔쾌히 지도교수가 되어주겠다고 하였다. 연구주제를 조금은 변경해야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괜찮았다. 아직 1년차이고, 내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녀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세상 게을렀고, 미팅시간에 20-30분 늦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어쩔 내가 한시간씩 그녀의 오피스 앞에 서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 만난 미팅에서는 2-3시간을 논의하였지만 항상 진전없는 토의가 대부분이었고, 내가 혼자 써내려간 논문을 들고 찾아갔을 때도 1 년 간은 그 논문을 쳐다도 보지 않다가 딱 1년째가 되어서 논문을 고쳐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논문이 나올 때까 그러나 지 꼬박 1년반을 기다렸다. 또한 그런 그녀에게는 리서치 펀딩이없었다. 우리 분야가 워낙 펀딩이 없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펀딩이없었고, 수업이 없는 여름학기에는 나는 스스로 내 생계를 이어나갈 펀딩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렇게 찾아나선 펀딩에서 지금 세번째, 두번째 반 정도가 되는 여자교수를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세살정도 많은 아주 젊은 여자교수였고, 나와 년차가 같았다.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할 당시 그녀는 교수에 임용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나는 3개월가량을 연구조교로 일했고, 그리고 나머지 3개월정도는 티칭조교를 하면서 그녀의 일들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연구조교로 일할 때 했던 분석들로 논문 쓰자고 하였고, 그렇게 그녀와 이런 저런 논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떤 데이터가 있고, 어떤 데이터를 써서 어떤 방법론을 써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도와서 내가 알고 있는 데이터들을 알려주고, 데이터를 가공하고, 그것으로 분석을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서 아이디어를 만들어서 논문을 완성시켜서서 가져갔다. 그녀는 내게 내년에 갈 학회 비용을 지원해준다고만 이야기를 하고는, 우리의 초록이 억셉이 되고, 정작 학회가 다음달로 눈앞에 닥치자, 내게 비용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다행히 나는 내가 따놓은 연구 Grant가 있었고, 나는 그 연구비를 사용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것만으로 괜찮았다. 그녀는 내 모든 것을 매니지하려 했고, 그렇게 그녀는 학회 발표전날 밤9시까지 나를 호텔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발표를 끝내고, 그녀는 내게 에디팅하는 중이라며, 보내준 새 페이퍼에는 그녀의 이름이 1저자로 가 있었다. 내가 1페이지부터 30페이지까지 다 쓰고, 모든 것을 다 분석했지만, 나는 2저자였다. 나는 그녀가 내게 연구조교의 일을 주었기에 이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넘어갔다.

 

 

 

그녀와 게으른 나의 어드바이저 둘에게 co-advising 받게 되면서, 그 둘은 내 연구를 무시했고, 제대로된 피드백이 아닌 어떻게 하면 내 연구들을 크리틱할 수 있을까에만 집중했다. 지난 10월부터 4개월 동안 수차례의 만남을 가지면서 매번 2시간씩 나는 그녀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들을 들었다. 내가 가져온 연구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하여, 나는 그녀들 앞에서 열심히 항변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게 내가 내온 연구주제는 다 쓸모가 없어서 자신이 뭐라도 코멘트 달아줄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녀들의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코멘트에 맞서(절대로 내게 어떠한 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열심히 내 프로포잘을 다듬고 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주 나는 내 최선을 다해 40장에 달하는 프로포절을 써갔다. 하지만 그 둘 중 누구도 나와의 미팅 전까지 그 프로포절을 읽지 않았다. 내가 미팅을 위해 그 젊은 어드바이저의 방에 들어가자, 그제서야 이제 막 뽑은 따끈따끈한 A4 용지를 들고, 형광펜을 들고 세개의 연구질문에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게 그 자리에서 그 세가지 질문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이 다시 대차게 나의 연구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둘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에게 고쳐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나는 고친 논문을 들고 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젊은 어드바이저는 고개를 흔들며, 내게 화이트 보드 앞에 가서 서서 설명해보라고 했고, 나는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참고문헌으로 보았다는 것들을 다들 쓸모없는 등급의 페이퍼들을 들고 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나는 귀가 안들렸고, 눈이 캄캄해졌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나는 있는 힘껏 이야기 해보려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흐르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그녀들의 태도는 참으로 disrespectful했고, 나는 더이상 이런 고통을 겪으며 대학원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내 연구를 봐주지 않고, 내 연구를 가로채고, 서포트 해주기보다는 비난을 일삼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과연 내가 대학원 생활을, 박사를 하고 싶었는가라는 근본적이 질문이 들었다. 그저 나는 나의 인격장애 부모들로부터 도망쳐 미국에 나오고 싶었고,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나는 대학원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게 더이상 내 영혼이 상처받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매일 밤을 울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기파괴적으로 술을 마시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폭음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나와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박사, 남들이 우러러 봐준다는 그 박사, 이름 앞에도 붙는다는 dr., 하지만 이 모든게 내가 행복하지 않다며, 내가 너무 상처받아서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박사 따면 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미뤄두었던 통번역공부와 번역작업, 그리고 글쓰기 작업등을 미뤄가며, 내 삶을 저당잡혀 살아가는 이 시간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 나는 학교 산하 상담센터의 상담을 신청해놓았다. 그리고 다음주중 학과 헤드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전해서 더이상 미련이 없다는 내 의사를 전할 것이다. 후회보다는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내 자신이 된 것 같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