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리의 삶쓰기

어제밤 과음이 내게 남긴 것들. 본문

삶 이야기(부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어제밤 과음이 내게 남긴 것들.

헤일리씨 2020. 2. 11. 13:26

일요일 점심즈음, 나는 요리를 하며 맥주 한캔을 따서 마셨다. 마음이 답답하고, 계속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교 1-2학년시절 재미로 마셨던 음주 이후로 나는 그리 자주 음주를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생활을 하면서 안 좋은 버릇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친구를 만들기보다, 밖에 나가서 무엇인가를 하기보단, 편의점에서 4캔 만원인 세계맥주를 사들고 와서 영화 한편 틀어놓고 마시는 500씨씨의 맥주 한잔의 값싼 위로에 나 자신을 기대었다. 그래서인지 파블로프의 개처럼, 마음이 울쩍하고, 고단함이 밀려올때에는 달콤 쌉싸름한 맥주한캔의 위로가 절실하게 느꼈다. 어쩌면 그 위로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버텨온걸지도 모른다. 성격상 친구 한명 없었던 내게 맥주는 유일한 소울메이트였다. 

 

 

 

 

그래서인지 박사과정에 입학한 뒤로 부쩍이나 맥주를 마시는 날이 늘었다. 밤늦게까지 연구를 해야하는 날이 아닌 이상, 저녁 즈음 들어와 작은 밀러라이트나 버드라이트를 따며 요리하는 일상이 내게는 소중한 일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캔 두캔 마셔가던 술에 내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 잦았다. 남는 시간에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고 했지만 한캔 두캔 따여진 맥주는 내게 글 쓸 기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우울감에 젖어 있는 나를 더 깊은 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첫잔은 기분이 좋았지만 두번째잔부터는 맥주와 눈물은 항상 함께였다.

 

 

 

 

아마, 어제도 겉으로는 괜찮다 괜찮다 이야기 했을지언정 내 마음은 괴로움과 슬픔 그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숨겨온 내 마음을 끌어낸 것도ㅇ 어제 요리하다 마신 맥주 한캔이었다. 남편과 나는 점심을 먹고 각자 할일을 하기로 했지만 나는 혼자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맥주 한캔, 두캔을 보태었다. 그냥 이 상황에서 모든 정신을 잃고 내가 잡고 있는 얇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나는 혼자 몇캔의 맥주를 마시곤, 침대 위에서 실컷 울었다. 몇시간이고 울다가, 겨우 지쳤을 때서야 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중간중간 잠깐 기억이 나는 것은 남편의 따뜻한 위로였다. 남편은 맥주를 마시고는 혼자 울기만 하는 나를 혼내지도, 야단치지도 않았다. 

 

 

 

 

 

앞으로 내가 보낼 시간들은 맥주에 기대지 않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이 대부분이어서, 굳이 냉장고 속 깊숙하게 숨겨진 맥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내가 되고 싶다. 힘든 순간이 생겼을 땐, 행복한 일을 생각하며, 훌훌 털어내버리는 내가 되고 싶다. 이제 나는 맥주에게 내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한다. 짧은 인생에 맥주없이는 보내줄 수 없었던 그 괴로움들을 이제는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괴로움을 참다보면 즐거움이 올 것이라는 신화적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는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들이 사랑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중학교 때는 괴로움을 버티며 공부하다보면, 특목고에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고등학교 때는 죽도록 힘든 슬픔과 괴로움에서 버티고, 공부하다보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대학교 때는 열심히 학점따고 장학금 받으면 좋은 대학원에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것은 그 괴로움 너머에 있는 더 큰 괴로움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행복과 즐거움은 있지 않았다. 괴로움너머 괴로움, 이 굴레를 언제쯤 끊어낼 수 있을까. 결국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인걸까. 결국 내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이 순간만이라도 그 괴로움을 잊어보자고했다. 나는 즐거움과 지금의 가치를 무시했다. 괴로움이 인생을 구성하는 오직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도 내 생각은 틀렸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그 방법들을 나는 비겁하게 피하고 외면하기만 했다. 

 

 

 

 

이제는 내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피하는 비겁한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라 숙취에 깨질듯한 머리를 잡으며 다짐했다. 그리고 괴로움에 맥주 한캔을 따며, 쓸쓸한 위로를 받는 그 습관도 끊어버리고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