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리의 삶쓰기

밸런타인데이와 <나목> 본문

삶 이야기(부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밸런타인데이와 <나목>

헤일리씨 2020. 2. 15. 01:37

내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물어보면, 항상 박완서 작가님이라고 대답한다. 

 

작가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너무 슬펐고, 한동안 박완서 작가님 앓이를 하며 읽었던 책을 또 읽곤 했다.

다시 그녀의 새로운 이야기를 못 들을 테지만, 그래도 책으로라도 남아있기에, 언제라도 내 책장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짧은 연애기간 동안 나는 여러권의 책을 선물해줬다. 내가 읽었던 책 중에 정말 좋았던 책들을 선별해서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책 앞장에 왜 내가 이책을 선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짤막한 글귀를 써서 주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부터 전자책이 나온 것들은 전자책으로 사보았다. 출퇴근 시간 만원 지하철에서 책을 펴 읽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나는 오며 가며 휴대폰으로 쉽게 읽을 수 있게 전자책으로 많은 책들을 구매해서 읽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종이책들을 선물해주었다. 책장에 내가 준 책들을 꽂아놓고, 그 책들의 제목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하라는 조그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 내가 박완서 작가님 소설 중에 가장 좋아하는 <나목>을 선물해주었다. 그녀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고, 작품의 배경 공간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남대문과 신세계 본점, 계동 지역이었기에 좀 더 깊은 상상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나목>을 읽고 난 뒤 나는 신세계 본점만 가면, 여기 어딘가에 전쟁의 아픔을 숨기고 일하고 있는 경아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겨져 있는 <나목>은 박완서 작가님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첫 작품이다. 삶의 아픔과 상처를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흔이 다 되어서 낸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그녀처럼 늦은 나이에 소설 한 편 낼 수 있지 않을까 위안을 얻었다. 

 

 

 

 

남편이 이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안 읽은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내가 준 모든 책들을 안고 미국으로 왔다. 내가 준 모든 책들이 다 소중해서 한국에 놔두고 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예쁜 마음에 나는 소소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은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정말 오랜만에 책장 중간에 있는 <나목>을 꺼냈다. 책의 첫장에는 연애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내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 글귀를 보자 하니, 오글거림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단단한 우리 가족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밸런타인데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메일함에는 밸런타인 데이 선물을 사라는 광고성 메일들로 가득 차있다. 우리에게는 별다를 바 없는 금요일이지만, 우리가 주고 받았던 책들 사이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사랑은 항상 같은 모양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