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리의 삶쓰기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본문

삶 이야기(부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헤일리씨 2020. 2. 18. 01:20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을 해놓고도, 나는 예전보다 더 잘 먹고 잘 잔다.

악몽을 더 이상 꾸지도 않고, 아침마다 무거운 짐을 안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꽤 몇 년 동안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오늘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교수님들에게 혼나지 않을까, 영어는 입 밖으로 잘 나올까, 혹여 영어로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그날 하루가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기보다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 내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저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하기에 내 기력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인정하기 싫어도 나는 우울증인 것 같았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항상 주눅 들어 있었다.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하다가도 나는 안될 거야라는 패배의식에 지배당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이나 페이퍼를 들고 교수님 앞에 갈 때가 되면 가슴이 쉴 새 없이 쿵쾅 거렸다 못해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30분이 넘어가면 교수님의 목소리는 공기로 흝뿌려져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남편과 내 주변 동료들은 누구보다 잘해 나아가고 있다며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성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차근차근 스펙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가 이 삶을 잘 버텨나가고 있다고 말해주기엔 부족했다. 나에게 내 삶의 무게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내가 좀 더 영어를 잘했더라면, 내가 좀 더 창의적인 연구질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 삶의 무게는 내가 느꼈던 만큼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잘못이 클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모든 어려움들을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남의 비판에 내 자존감이 훼손당하지 않을 만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삶의 무게를 충분히 버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내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는 너야. 네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라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버티라고만 했다. 남들도 다 하는데 왜 너는 그런 거 하나 못하냐며, 나를 비난했다. 그런 응원 없는 비난 속에 나는 타인의 비판이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믿으며 자라게 되었다. 남에게 비판당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하자. 그리고 잘 하자라는 다짐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버티다가만 보낼 인생이 문득 불쌍하게 느껴졌다.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타인의 비판에 나를 맞추며 버티기만 해야 하는지. 정녕 이 것이 내가 이 지구에 내려온 이유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의 인생과 그들의 인생이 끝나면 이 모든 괴로움도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일텐데. 그래서 더 늦기 전에라도 내 인생을 찾고 싶었다. 존재의 이유를 찾아 나서도 싶었다. 

 

 

 

그 여정을 시작하려 마음을 먹기만 했는데, 몸이 한결 가볍다. 미뤄두었던 집안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매번 내 손길을 그리워하는 냥이 아들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논문 써야 하는데, 논문 읽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안기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아들과 놀아주었을 텐데. 지금은 아들이 내 손을 잡고 자기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항상 내 곁에 머무르는 아들. 

 

인생 뭐 별거 있을까 싶다. 모두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듯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만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인생은 충분한 것 아닌가 싶다. 누구에게 보일 나의 사회적 위치, 지위, 명예, 그리고 과시. 이런 것들이 있다고 행복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