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리의 삶쓰기

15년만에 물감을 짜보았다. 본문

삶 이야기(부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15년만에 물감을 짜보았다.

헤일리씨 2020. 3. 11. 06:35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하든 참아오며 살았다.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런 마음과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라와서 나를 괴롭혔다.

 

'엄마, 아빠가 싫어하실 거야.'

'공부해야지 무슨 시간이 있어서.'

'돈 많이 드는데, 나중에 니 손으로 돈 번 다음에 해.'

'어차피 잘하지도 못하는 거 왜 하려고 해.'

 

특히나, 이런 생각들 중에서도 '돈'이라는 게 가장 큰 발목을 잡았다. 항상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돈이 많이 들 것 같은 것들은 무조건 피하고 보는 내 성격 때문이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왠만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공부만 하자가 나의 인생의 목표였던 것 같다. 공부하는 건, 생각보다 딱히 돈이 들지 않기에.

 

 

그렇게 나는 내가 하고싶은 던 것들을 쉽게 포기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특목고 준비로 인해 바빴던 와중에도, 나는 엄마 아빠를 졸라 미술학원을 다녔었다. 특목고 준비생이 수학학원은 안 다니고, 미술학원을 다녔다니. 웃긴 사실이지만, 그만큼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미술 선생님도 나의 그림을 꽤 자주 칭찬해주셨고, 내 그림의 색채가 세잔을 닮았다며 좋아해 주셨다. 그때부터 폴 세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나는 '접시 위의 사과'가 가장 좋았다. 

 

 

세잔의 사과를 좋아하던 나는 특목고에 가고 공대로 진학하면서 미술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게 되었다. 그나마 미술을 할 수 있는 학문인 건축학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부모님은 건축학과는 돈도 많이 들고, 나와서 취직도 안되는데 거 길 가서 뭐하냐며 크게 반대를 하셨다. 나에게 건축가들이 고생하는 걸 담아놓은 책들을 사주시면서, 이렇게 힘들다고 하는데도 넌 거길 그렇게 가고 싶냐며 잔소리를 하셨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해볼 기회를 박탈당하며 삶을 유지해 나아갔다. 그러다 탈이 난 지금에서야 나는 좋아하는 걸 시도해볼 용기를 내보았다. 드디어 어제 남편 손을 잡고, 집 주변에 있는 화방을 방문했다. 화방의 향기와 색색의 물감들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해지는 느낌. 나는 12개의 수채화물감이 들어있는 세트 하나와 작은 스케치북, 4b와 6b연필 각각 한 자루씩을 사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왠지 앞으로는 꽤 자주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물감에 그려져 있는 반고흐 선생님.